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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일상의 경이로움, 뜻밖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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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 민지가 여덟살 때, 제가 일하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본 아이에게 감상을 물었어요. 어린 민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다시 뭐라고 하면 사람들이 멈추는 게 재밌었어.” 저의 큐 사인에 수십명의 출연자와 제작진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했나 봅니다. 둘째 민서는 저의 드라마 촬영 현장에 와 본 적이 없어요. 지난 7년간 드라마 연출에서 배제된 탓에 기회가 없었지요. 대신 민서는 제가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저자 강연을 하는 모습을 봤어요. 큰딸 민지의 꿈은 드라마 피디이고, 둘째 민서의 꿈은 작가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직업이 창작자입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시간 도둑을 다룬 소설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는 아버지가 화가였어요. 화가 에드가어 엔데는 나치에 의해 반사회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림 제작을 금지당했대요. 엔데가 6살이던 때부터 10년간 화가인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나치 당국의 검열로 일을 하지 못했는데, 미하엘 엔데는 그 시간이 자신을 작가로 만든 바탕이라고 말합니다. 유년 시절, 한가한 아버지와 농밀한 시간을 보낸 것이 작가로서 정체성을 쌓게 된 계기였다고요. 

<엔데의 유언>이라는 책을 보면, 아버지 엔데가 아들 엔데에게 가르쳐준 것은 경탄하는 자세랍니다. 아버지는 항상 세상의 신기한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사람이었대요. 눈 내린 아침에 어린 아들과 산책하던 에드가어 엔데는 눈 덮인 조각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정말 멋지지 않니? 조각상이 눈 모자를 썼어!” 

엔데의 추억 속에서 아버지 에드가어는 사소한 일에도 감동하고 놀라는 사람이었어요. 놀라움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원한 아이다움이자 창조의 샘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건 세상의 경이로움인데요, 제게 세상의 경이로움을 가르쳐주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아내가 스물세살이던 학창 시절이었어요. 아내에게 청혼하면서 그랬지요. “당신 곁에서 당신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고. 아내를 만나기 전 그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길이 없어 아쉬웠는데요. 딸을 낳고 깨달았습니다. ‘아, 아내를 닮은 딸을 보내, 아내의 평생을 지켜볼 수 있게 하려고 하늘이 준 선물이구나.’ 2012년 문화방송(MBC) 파업 당시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지난 7년 드라마 연출에서 배제된 삶을 살았어요. 그 덕분에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놀이공원과 물놀이장과 썰매장을 다니며 다시 유년 시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어요. 아이들과 함께한 한가한 일상이 제게는 뜻밖의 선물이었어요. 언젠가는 아이들도 그 선물 덕분에 창작자로 즐겁게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창작자를 꿈꾸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가한 일상이고, 일상의 발견을 놀라움으로 바꾸는 경탄하는 자세니까요.

글·사진 김민식 문화방송 피디 seinfeld6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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