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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영어교육, 진보의 콤플렉스를 깨라 / 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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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이석문이라는 교육의원이 있다. 내가 오륙년 전부터 그를 눈여겨봐온 것은 그가 ‘영어’와 ‘진보’의 함수관계를 풀어갈 실마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직교사 출신이자 전교조 제주지부장이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영어교육 원칙에 동의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모아 ‘들엄시민’이라는 대안적 영어교육 모임을 운영했다. 그리고 경쟁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는 저비용·고효율 영어교육 방법으로 아이와 부모를 모두 만족시키는 영어교육에 성공하였다. 최근에 이러한 경험담을 담은 <듣고, 즐기고, 소통하자!>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는 현재의 영어교육 풍토에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시되었던 관계로 영어 구사 능력이 일종의 특권으로 구실했다. 둘째로 기업과 대학을 중심으로 과도한 영어 스펙을 요구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셋째로 영어 사교육이 도가 지나친 수준으로 벌어진다. 통계를 보면 사교육 ‘시간’으로 으뜸은 수학이지만, 사교육 ‘비용’으로 으뜸은 영어다.

이러한 반감은 나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 문제는 마땅한 대안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설령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영어교육 수요가 그리 줄어들지 않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는 재벌 대기업에 몰려 있는데 이들은 주로 수출로 먹고산다. 자연히 영어 구사 능력을 필요로 하는 업무 비율이 높다. 우리나라 전체 경제를 기준으로 봐도,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져 70%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최근 3년 연속 100%를 넘고 있다.(국내총생산 대비 수출·수입 총액 비율) 흔히들 영어교육 수요를 제어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일본을 언급하는데, 참고로 언급하자면 일본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겨우 25%다.

진보가 집권한다 해도 이런 구조적인 특성을 단기에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진정시켜야 하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막연한 미래의 기대에 근거하여 영어 사교육을 줄이라고 학부모에게 요구하는 것 또한 불합리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단순히 지금의 ‘미친’ 영어교육을 저주하는 게 아니라, 영어교육을 ‘두려움과 피로’에서 탈출시킨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이를 확산시키는 일일 것이다.

이석문 교육의원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흔히 ‘엄마표 영어’에서 활용되는 영상물 보기·듣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진보에게 그리 낯선 방법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엄마표 영어의 원조 중 한 사람인 이남수씨(‘솔빛엄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도 참교육학부모회 울산지부장 출신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공교육에서 실현할 수는 없을까?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재의 공교육으로는 어렵다.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공교육이 ‘평가의 변별력’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본란 6월6일치 ‘박근혜 대통령님, 잘못 알고 계십니다!’에서 지적한 바 있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공교육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만 다루려 한다는 것이다. 영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당 두세 시간의 학교 수업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결국 학교 밖 영어 노출 시간을 인터넷·모바일 및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진보적 영어교육의 시발점은 바로 여기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진보’의 증표가 날카로운 칼날만이 아니라 실용을 감싸는 넉넉함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범 교육평론가


(*한겨레신문 2013년 1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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