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시대의 일부 민족에서는 엄마의 출산일이 다가오면, 아빠는 자리에 누워 출산의 고통을 흉내 내는 거짓 의식을 벌인다. 이를 통해 주위 사람들은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출산 장소와 같은 모양으로 집을 만드는데 모든 악령들을 그 곳으로 불러들여 엄마와 아기가 안전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이다. 인도 남부의 에리칼라-반두(Erickala-Vandu)족들은 엄마가 진통을 시작하면, 아빠는 엄마가 평상시 입던 옷을 입고, 여자들만이 이마에다 표시하는 마크를 자기의 이마에다 표시하는 풍습이 있다. 아빠는 희미한 불빛만 있는 어두운 방으로 가서 긴 천으로 몸을 덮고 눕는데,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 곁의 유아용 침대에 눕힌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은 오늘날에는 아빠가 엄마의 출산 예비수업에 참여하거나 분만실에 들어가 분만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엄마의 분만과정에 참여하는 아빠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아빠가 분만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빠의 분만실 출입이 아기에게 주된 감염 요인이라고 생각했던 의학적 판단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만실에서 엄마의 출산을 지켜보며 엄마의 고통을 함께 한 45,000명의 아빠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분만실에 아빠가 있기 때문에 생긴 감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출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영향을 주었다. 의학의 발달로 이제 출산은 하나의 위험한 과정으로 생각되기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일상적인 단계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의사들은 출산의 과정을 보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바꾸었으며 산모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병실을 가정집처럼 꾸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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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예비수업
아빠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임신 중에 엄마와 함께 들었던 출산 예비수업 덕택에 아빠들은 엄마의 출산 동안 엄마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아빠들은 분만실에 들어가면 충격적인 경험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출산 시 오히려 아빠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출산 예비수업에서 엄마뿐 아니라 아빠들도 점차 호흡법이나 준비 체조를 배우는 일이 늘고 있다. 출산 예비수업에서 아빠들은 임신과 출산의 생리학적 과정에 대해 배우며, 출산 시 일어나는 진통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호흡법을 익히고 있다. 출산 예비수업을 받은 아빠들은 분만 과정에서 진통 여부를 체크하고, 엄마를 따라 함께 숨을 쉬거나, 등을 주물러 주거나, 얼음 조각이나 주스를 가져왔다. 또 아내가 원하는 것을 의사나 간호사에게 알려 주며, 아내에게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아내의 고통을 줄여준다. 이렇게 출산 예비수업을 받은 아빠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분만에 참여한다. 그러나 출산 예비수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엄마의 분만에 일부만 참여하면 엄마의 고통을 줄여주는 효과는 반감된다.
헨본(Henneborn)과 코간(Cogan)의 연구에 의하면 출산 예비수업에 참여한 아빠들이라고 하더라도 진통이 시작될 때부터 분만 때까지 엄마 곁을 지켰던 아빠가 진통이 처음 시작되는 동안만 분만실에 있었던 아빠보다 엄마의 진통을 더 많이 반감시켰으며, 진통제 사용을 줄였고, 출산에 대한 엄마의 인식도 더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출산 경험에 대한 엄마의 긍정적인 반응은 부부관계는 물론 모자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는 엄마가 분만 과정에서 황홀감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엔트비슬레(Entwisle)와 도링(Doering)에 의하면 엄마가 진통이 한창 있을 때 아빠가 곁에 있었던 경우 엄마는 감정이 복받치는 출산의 쾌감을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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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더스 하이
아빠가 분만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아내에게만 좋은 것은 아니다. 남편의 생활에도 질적인 변화를 준다는 것이다. 단지 아내들의 분만에 참여한 것뿐인데, 아빠들은 출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들 중 4분의 1은 황홀감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기실에만 있었던 아빠들은 아무도 이런 황홀감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만실에 들어가지 않았던 아빠의 88%가 분만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데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만과정에서 아빠는 큰 감동을 받는다. 아빠가 분만 과정에 참여하면서 진정한 아빠가 되고 진정한 남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내 유전자를 가진 내 아기를 낳는 고통의 순간을 지켜보는 아빠의 뇌는 황홀감을 일으키는 엔도르핀에 의해 적셔져 파더스 하이(Father's High)를 경험한다. 가족의 어려움을 묵묵히 지켜보고 그것을 잘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가장의 진정한 역할을 겪는 것이다.
더구나 아빠가 분만 과정에 참여하면 아내보다 먼저 아기를 안아볼 수 있다. 신생아와의 빠른 접촉은 부성애를 강화시키고 유지시키는데 매우 중요하며 이후 아빠와 자녀의 애착형성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직접 아기를 분만시킨 아빠들은 신생아의 양육에도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신생아를 출생 후 3개월 동안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아기를 분만시킨 아빠들은 다른 아빠들에 비하여 매일 한두 시간 이상 더 아기와 함께 보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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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역할을 일찍부터 익혀라
일부 영장류의 수컷들은 야생 상태에서 자기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봐준다. 아메리카대륙의 아마모셋(Marmoset)이나 타마린(Tamarin)종의 원숭이들은 거의 수컷들이 새끼를 키운다. 이 수컷들은 암컷이 새끼를 낳을 때 도와주며, 새끼가 태어나면 처음 몇 달 동안은 낮에 새끼를 돌보고, 음식물을 잘게 씹어 새끼들에게 주기도 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바바리 마카크(Barbary macaque)종의 수컷 원숭이들도 어린 새끼들을 돌보고 보호한다. 인간을 제외한 영장류에서는 숫컷들이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봐두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들이 엄마들에 비하여 부성애가 부족하고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자녀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린트(Lind)는 자연 분만된 아기의 아빠와는 달리 제왕절개로 분만된 아기의 아빠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제왕절개로 분만된 아기의 아빠는 제왕절개로 회복이 더딘 엄마 때문에 처음부터 할 일 많다. 제왕절개를 한 엄마는 자연분만한 엄마보다 출산 후 힘들고 회복이 늦어지기 때문에 아빠가 양육의 짐을 일부 같이 져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아기와의 접촉이 증가될 수밖에 없다. 병원에서 아기를 돌보았던 아빠들은 3개월 후에도 집에서 아기를 더 잘 돌본다고 한다. 아빠는 일찍 아빠의 역할을 익히면 익힐수록 출산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아빠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엄마들은 임신 초기부터 태교를 시작하는 데 반해, 아빠들은 대부분 태동을 느끼는 때부터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흡연을 하는 아빠들은 엄마가 임신 5개월이 되어서야 옆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임신 기간 내내 엄마 옆에서 흡연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제 우리나라 아빠들도 엄마의 임신 초기부터 아빠의 역할을 익혀야 한다. 임신 초기부터 태교에 관심을 갖고 출산 예비수업에도 참여하여 엄마의 분만과정에서 엄마를 도와야 한다. 그래야 아기가 출생한 후에도 아기를 잘 돌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빠의 부성애는 충만해지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