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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버지상이 요즘 많이 바뀌고 있다. 어떤 가정은 남편이 전업주부가 되어 요리와 육아를 전담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특히 유교적인 전통에서 살아오신 어버지는 어려서 할아버지와 한 상에 앉아 식사하는 시간이 늘 두려웠다고 한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야 했고, 조금이라도 밥 먹는 소리가 나면 바로 호통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반찬은 당신 앞에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을 뿐, 멀리 놓인 반찬을 집기 위해 손을 뻗는 일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수저를 드실 때까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참아야 했고, 할아버지가 수저를 내려놓으시면 더 먹고 싶어도 상을 치워야 했다고 하니 소화나 잘되셨을까 싶다. 그렇게 엄하게 자라나신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한 한번도 주방에서 물을 떠다 주시거나 밥을 퍼다 주신 적이 없는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의 맏며느리 역할도 아주 전형적이었다. 맞벌이를 하셨으면서도 엄마는 집에 들어오면 늘 주방에 들어가셨고, 요리와 청소, 양육은 모두 엄마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서 딱 한번 아버지가 주방에 들어가신 날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셔서는 바로 주방으로 가시더니,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두르셨다. 나는 신기해서 아버지 곁을 졸졸 쫓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아버지는 "조금만 기다려, 오늘은 아빠가 맛있는 거 해 줄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하시는 아버지 친구를 만나고 오시는 길이었는데, 그날 점심으로 먹은 짜장이 기가 막히게 맛있어서 딸래미 아들래미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엄마는 기대반 걱정반 얼굴로 한걸음 물러나 반쯤 미소를 띤 얼굴이셨다. 지금도 그때의 행복했던 기분이 잊혀지질 않는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계셨던 수첩 안에는 빼곡하게 짜장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재료들을 썰고 다지고 볶는 소리가 맛있게 나기 시작했다. 집안 전체에 채소 볶는 소리에 고소한 짜장냄새가 진동을 했다. 배가 너무 고프고 빨리 먹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서 아빠를 재촉했다. "아빠, 언제 되는데? 지금 먹어봐도 돼? " 아버지가 기분좋게 웃으시며 나무주걱으로 솥을 휘젖던 모습이 생생하다. 아빠 곁에 바짝 붙어 서서 간을 보며 꼬르륵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드디어 완성된 아빠의 짜장은 맛이 정말 기가 막혔다. 엄마와 오빠, 나는 감탄과 감동으로 짜장밥을 먹었다. "우리 아빠 최고야~"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권위적인 양반이셨지만, 늘 우리와 잘 놀아주셨었다. 이불을 펴놓고 레슬링도 가르쳐 주시고, 아버지 배에 올라타고 악기연주도 하게 해주셨다. 하지만 한번도 밥상을 차려주신 적은 없었다. 그러던 아버지의 대반전 짜장이었으니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짜장에 관해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다.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제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중화요리점을 운영하는 화교집안이었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피자나 치킨집이 없었고, 외식이나 주말간식으로는 짜장면에 탕수육이 최고였다. 아버지는 내가 성적이 오르거나 상장을 받아 온 날에는 짜장면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셨다. 2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원을 들고 친구네 집으로 가면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는 친구를 볼 수 있었는데, 맨 처음에는 왜 가족들끼리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걸까 오해를 했었다. 중국어 발음이 내게는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면 친구도 함께 짜장면을 먹었고, 항상 군만두나 작은 접시에 담긴 탕수육이 곁들여져 나오는 호사를 누렸다. 중국 식을 배부르게 먹고 친구네서 뒹굴 거리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초등시절에는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 만으로도 새로운 볼거리, 먹을거리, 친구가 풍요로워 좋았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런 재미는 점점 사라졌던 것 같다. 가끔 친구네 주방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면은 큰 솥뚜껑같은 후라이팬에 기름이 늘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가 났던 게 전부다. 가끔 그 팬에서 불이 붙었는줄 알고 깜짝 놀라면 아저씨가 요리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던 기억도 난다.
짜장에 관한 잊을 수 없는 추억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짜장면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채식인이 된 후로는 중국요리를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채식중국집이 있긴 하지만 저렴한 가격에 한 끼 식사를 먹자고 일부러 찾아갈 정도의 거리에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짜장 먹는 일을 포기할 순 없는 법. 채식자장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얼핏 생각하면 참 피곤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몸을 움직이는 만큼 좋아지는 것들도 많았다. 예전에는 그저 중국집에서 간단히 주문만 하면 눈앞에 바로 짜장면이 나타났지만, 이젠 손으로 직접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짜장의 원재료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런 맛이 나는지도 알게 되었다. 짜장의 원재료인 춘장은 콩으로 만들어지는데, 중국식과 일본식 춘장이 있다. 중국식은 콩을 발효시켜 오랫동안 숙성시켜 검은색을 띠게 하는 반면, 일본식은 일본된장에 카라멜 색소, 단맛을 내는 스테비오사이드, 물엿 등의 첨가물을 넣어 달짝지근하게 만들어진다. 대개 우리나라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의 맛은 일본식 춘장으로 맛을 낸 것이다.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먹었던 짜장은 화교친구네 집에서 먹은 것이니 중국식으로 대두, 쌀, 보리, 밀 등에 종국과 식염을 넣어 발효숙성 시킨 것이었을 게다. 단맛이 났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중국식 춘장으로 조리할 때 물엿이나 카라멜 색소를 좀 섞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네 중국집에서 가족들끼리 먹는 짜장맛이 손님들한테 주는 맛과 틀렸던 것도 같다.
아무튼 집에서 직접 춘장을 만들어보는 노동을 감수하기엔 짜장에 대한 나의 열정이 이프로 부족했던 지라, 춘장에 카라멜 색소를 섞지 않은 원재료를 구하는 단계부터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밀가루와 대두, 식염과 종국, 주정으로만 만든 춘장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카레 만들듯 재료들을 볶다가 춘장을 넣어 끓이면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요리를 했더니 맛이 이상해서 역시 우리의 입맛은 첨가물에 길들여진 것이구나 싶어 씁쓸해지고 말았다. 차분하게 춘장 만드는 법을 검색해보니, 기름에 튀겨야 제 맛이 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친구네 주방에서 들리던 요란한 기름 지글거리는 소리가 이해가 되었다. 춘장 재료의 거의 두 배 정도의 오일을 팬에 붓고, 불을 켜서 오일을 데운 다음 춘장을 넣어 튀기는 기분으로 저어주면 된다. 이때 기름을 아끼려고 박하게 부으면 고소한 냄새가 덜 난다. 중국집에서는 일반적으로 돼지기름에 튀기기도 하는데, 느끼한 맛을 싫어하거나 소화기능이 약한 분들이라면 식물성 오일로 춘장을 튀겨서 체에 받쳐 기름기를 빼 낸 후 요리에 사용하면 된다. 한번에 많은 양을 만들어두었다가 유리병에 보관해두고 사용하면 편하다.
튀긴 춘장이 준비되었다면, 그 다음엔 채소를 썰어 볶는 것부터 시작한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짜장은 뭔가 맛이 심심할 것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기름기를 쫙 뺀 담백하고 고소한 채식자장은 다이어트 걱정도 쉬어갈 수 있는 맛있고 착한 요리다. 몸이 좀 냉한 편인 나는 생강과 양파를 오일에 볶아 향을 먼저 낸다. 사천식으로 요리하고 싶을 때는 고추기름을 넣어 볶으면 좋다. 아니면 청양고추를 채썰어 생강, 양파와 함께 매운맛을 내보는 것도 맛있다. 일단 매운향이 진동하면 거기에 야채를 넣고 볶으면 된다. 이 때 고기 대신 두부를 작게 깍뚝썰기 하여 넣는다. 두부를 미리 튀겨 놓으면 고기의 질감을 대신할 수 있지만 그냥 넣어도 맛있다. 시간이 좀 남는 날에는 두부에 녹말옷을 입혀서 미리 튀겨놓았다가 요리하는데 그러면 조금 더 고소한 맛이 난다. 유부를 사용해보니 질감이나 맛이 떨어져서 그 다음부터는 그냥 직접 두부를 사용하게 되었다. 생강 양파향이 재료에 스며들어가서 은근하게 깊은 맛이 나는 게 일품이다. 이렇게 볶아진 재료들 위에 튀긴 춘장을 넣고 끓이면 된다. 좀 더 걸쭉한 자장을 원한다면 전분가루를 물에 개어 조금 풀어 같이 끓여주면 된다.
맛있는 짜장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면 우리 아들은 항상 제 방에서 나와 채소가 채 익기도 전에 냉큼 한숟가락을 먹어보고는 내가 예전에 아빠를 재촉했던 것처럼 말한다. “ 언제 먹을 수 있어? ”
움푹한 국대접 같은 곳에 짜장을 담아내면 왠지 맛이 없어 보인다. 넓적한 접시에 면이든, 고슬하게 지어진 밥이든 조금만 덜어 그 위에 짜장을 보기좋게 담고, 오이를 가늘게 채썰어 고명으로 얹어야 제맛이다. 통깨를 살살 뿌려주면 완성이다. 양은 많이 달라고 해도 조금만 담아주시기 바란다. 먹고 더 먹는 재미를 느끼는 게 배불러서 남기는 것보다 항상 옳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지나치게 배부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선물해주는 추억보다 그 과정에 같이 참여하는 추억이 더욱 오래 깊은 기억으로 남는것 같다.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