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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고 한다. 약 2년 정도는 태아 상태로 있어야 생존에 적합한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를 들자면, 모든 영장류는 물론이고 포유류 동물들 중에서 태어나자 마자 직립이 불가능한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생물체는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이동 능력이 있어야 하고, 직립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그것의 기본이다. 그래야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도 있고, 먹이 감을 구할 수도 있다. 개나 소나 말이나 돼지도 가능한 일을 인간만이 할 수 없다.(^^)
인간이 이렇게 미숙아로 태어나는 이유는 어머니의 안전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엄마들이 2년간이나 아이를 뱃속에 품고 다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엄마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그 무거운 배를 품고 뛰거나 숨거나 하는 일들은 너무 힘든 일일 것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생명이 위태롭다면, 그것은 즉 아이의 생명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계속된 진화를 위해, 인류의 보전을 위해 태아를 미숙아 상태로 출산시키기로 했다.
엄마가 위험하면 아이도 위험하니까, 일단 아이를 낳고 보자. 그러나 문제는 아이다. 미숙아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이 아이는 무엇이 필요할까? 엄마의 품이다. 자궁만큼 안전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품이다. 지금 우리가 미숙아에게 인큐베이터를 제공하듯 모든 인류의 신생아는 엄마의 품이라는 인큐베이터가 최소 1년은 제공되어야 한다. 그 1년은 아이가 직립 보행이 가능해 질 때라는 시기와 동일하다.
엄마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 다니는 본능에 충실해 진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들이 세상을 탐색할 때 얻는 정보의 통로는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입과 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형체도, 질감도, 경도도, 입을 통해서 알게 된다. 먹잇감을 찾아서 주변의 모든 것을 탐색하는 일,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가장 본능적 행위이다. 어른들의 눈에 그런 행동은 그저 놀이감을 찾아 다니는 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전 존재를 걸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는 필사적인 일이다.
아이들의 이런 행위를 심리학에서 조차 ‘자율성의 시기’라고 저평가한다. 물론 이런 행위를 통해 자율성이라는 사회적 교류행위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때 형성된 각 개인의 상이한 자율성은 평생 그(녀)의 자율성에 밑 그림이 된다.
오늘의 본론을 여기서 이야기하자면, 끊임없이 탐색하고 새로운 것을 보면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 가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가려 내는 아이들의 본능적 행위가 부모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거나 장려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아이들의 평생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누워만 있거나 기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두 발로 일어 선다.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환호하고 감격해 한다. 그리고 아이는 그 환호를 들으며 자신의 직립보행이 축하 받을 일이라는 것을 감각한다. 그리고 아이의 걸음마는 맞은편에서 기다리는 부모나 양육자의 가슴을 졸이게 하다, 마침내 엄마의 손을 잡고 몇 걸음을 완성하고 나면 기쁨의 포옹을 아이와 나눈다. 아이의 이동은 참으로 축하 받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의 직립보행이 환영 받는 것은 대체로 이것으로 종료다. 이동이 자유로워 지고, 약간의 소통이 가능해 지면서부터 아이들은 엄마 또는 주 양육자의 통제를 받는다. 지금처럼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감독하기 좋은 거주형태에서 이 통제는 철저하다. "안돼, 하지마, 가만히 있어, 만지지 마, 빨리 먹어, 맞는다, 하지 말랬지… "라는 말은 한 연구에 의하면 2~3세 무렵 아이들이 하루 중 듣는 상당수의 언어는 ‘금지명령어’라고 한다.
상상해 보자. 성인인 당신이 어떤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당신보다 힘세고 덩치도 무지 클 뿐 아니라, 밥을 안 줘서 굶어 죽게도 할 수 있는, 때려서 죽게도 할 수 있는 즉,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한 사람이 계속 당신의 행동을 금지하고, 사사건건 명령한다면 당신의 정신상태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자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공감 능력은 대체로 필요에 미치지 못한다.
이 시기에 계속된 양육자의 통제는 아이의 생명력, 창조성, 열정을 일정한 수준 이하로 압착시켜 버린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상담센터에서 청소년 상담의 가장 흔한 주제는 ‘무기력’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의 무기력은 성적이 떨어져서거나,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서이거나, 장래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미 이 아이들은 2~3세 무렵부터 과도한 통제와 금지와 명령 속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많다.
직립보행과 함께 획득한 영토 안팎으로의 이동권과 가능성의 탐색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부모의 통제가 고사시켜 버린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를 닦달할수록 아이는 더 수동적이 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렇게 아이를 통제하면서 하는 일이, 두 살 짜리에게 영어 비디오를 보여주고, 문자로 된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혼내는, 절망의 현장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그렇게 하면서도 부모들은 한 마디 꼭 덧붙인다. “저희는 시키는 것도 아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