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 이억배 그림
바우솔 펴냄·1만2000원
“온전히 검은 바위산 비탈 밑/ 거기 숨어 있는 풀밭이 있다// 어김없이 유목 살림 천막이 쳐져 있고/ 양 떼 있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막내아들 여섯 살배기 텐진/ …”
창작 그림책 1세대로 아름답고 온기 넘치는 그림책을 그려온 이억배 작가는 2012년 초 안성도서관에서 고은 시인의 시 전집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위에 시의 앞부분을 인용한 <5대 가족>이었다. “숨겨진 보물창고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작가의 말)
작가는 이 감동을 그림책으로 전하기 위해 티베트로 떠났다. “거대한 공룡의 늙은 껍질처럼 드러난 알몸의 산등성이에서 야크와 양 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고원 위에 서서 텐진과 5대 가족이 유목의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림책 <5대 가족>을 완성했다. 평온하면서 사랑스러운 표정의 양 떼와 개, 그리고 검게 탄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을 지닌 텐진 가족의 삶이 오롯이 책 한권에 담겼다.
온전히 검은 바위산 비탈 밑
숨어있는 풀밭의 야크와 양떼
천막 친 5대 가족의 삶 오롯이
시의 내용은 이렇다. 고조할아버지부터 6살 텐진까지 일곱 식구는 양 떼를 몰며 살아간다. 쌍둥이 형은 남의 집 양을 돌본다. 어느 날 양 한마리가 태어나 텐진은 신이 나서 기쁜 소식을 식구들에게 알린다. 텐진은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작은 천막에서 식구들과 바짝 붙어 누워 잠이 든다. 그리고 텐진의 식구들은 다음날이면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야 한다.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는 풀밭을// 용케/ 고조할아버지와/ 양 떼 암컷들이 먼저 안다// ‘저기다, 저기…’”
정착민의 뿌리를 지닌 우리에게 유목민의 일상은 낯설지만 섬세하면서도 정감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익숙한 풍경들이 떠오른다. 텐진네 할아버지들은 양털을 깎고 아버지는 낡은 천막을 고치고 엄마는 양젖을 짜고 할머니는 음식을 만든다. 고단한 노동이 끝난 뒤 식구들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이 든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아빠는 밭을 갈고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엄마는 밥을 지었던 우리의 대가족이 이들의 모습에 포개진다.
그저께 죽은 양과 오늘 새로 태어난 양 한마리. 삶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텐진네 가족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별을 세다 잠든 텐진의 머리 위로 짙푸른 하늘에 식구들 하나하나가 빛나는 별처럼 박혀 있는 그림이 꿈결 같다. 오래전 우리가 잃어버린 꿈의 풍경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그림 바우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