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 반이 흘렀습니다. 십여 명의 실종자들은 아직도 그 소식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감히 ‘미안하다’는 말조차 내뱉기 힘들었고, 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까봐 두렵고 겁나는 건 저 혼자만의 감정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왜 과거의 그 수많은 일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나,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우리가 또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하나 마음이 많이 복잡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2014년 2월 23일자)’은 내 인생을 잘 계획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성찰하고 그 안에서 의미 있는 배움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들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하이스코프 프로그램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놀이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계획-실행-평가’의 3단계 과정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Kathy Sylva 연구팀을 비롯한 교육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는 하이스코프 프로그램의 ‘백미’라 할 수 있지요.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내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능력 키우기에 이어, 내 경험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 키우기에 관한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2’를 시리즈로 이어가볼까 합니다.
아이들의 ‘학습’에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있어 기억이나 암기 능력(기술)에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얼마나 많이 기억해 낼 수 있느냐가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지요. 학원가에서 돌고 있는 ‘기적의 암기법’이니 ‘뇌 구조를 통한 기억법’이란 말도 다 같은 맥락의 요구와 필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암기에만 기댄 학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보니 소위 ‘학원빨’은 35살에 끝난다고 하더군요. 학교와 시험이라는 매우 인공적인 환경에서는 암기능력을 높여주는 학원이 효과를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학원식 암기학습에 익숙해진 삶이 스스로 판단하고 성찰하고 기획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평가, 반성하는 사고과정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여 분석하고 평가하는 이 작업은 전반적인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고과정인데 말이지요.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면서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깨닫고 배움을 보다 깊고 견고하게 만드는 이 작업은 기억이나 암기를 뛰어넘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언어나 수·과학적 사고발달은 물론 자기통제나 수행능력을 높이는데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Bodrova & Leong, 2007).
인간은 보통 만 3세를 전후하여 과거에 경험한 사람, 사물, 사건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내적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아이들은 경험에서 정보를 얻고 기억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구체적인 직접 경험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로 전환되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고, 가능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오늘 뭐했지? 어떻게 했지?”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머릿속에 형상화하며 그 이미지들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어린 아이 수준의 회상(회고) 및 평가 작업은 그저 기억되는 무언가를 상기시켜 말하는 것이 전부처럼 보일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놀았던 물건을 가리키거나 보여주고, 어쩌면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을 떠올리며 그 이름 정도를 말하겠지요. 어쩌면 놀이하는 동작을 말없이 보여주거나, 하고 놀았던 일이나 사건을 간단히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회상(회고) 작업에 조금 익숙한 아이라면 자기가 경험한 수많은 일 중 어떤 한 가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할 겁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과거의 다른 경험을 함께 말할 수도 있고, 원래 생각했던 의도나 계획과 연결해서 자신이 경험을 말하기도 합니다. 더 성숙한 아이라면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수정해서 행동한 후 달라진 결과를 말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이 중 어떤 발달단계에 있건 간에, 경험했던 많은 일 중에서 의미 있는 일을 골라 다양한 표상(말, 글, 그림, 음악, 동작 등)으로 재구성해내는 일은 자신의 경험을 인식하고 자각하여 얻어내는 통찰의 작업입니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 사물, 사건과 ‘나’를 연결시켜 그 관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기까지 요구되는 아주 중요한 삶의 연습이지요.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건강한 비판의식, ‘가만히 있지 않는’ 다부진 행동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일상의 훈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한겨레 사진 자료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을 포함한 남녀노소 모두 과거에 대한 회고(회상)나 성찰은 그 일에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담겨있었을 때 가능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 중 아이들이 어떤 것을 말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요. 아이가 경험한 일 중 엄마(아빠)가 강한 인상을 받고 감정과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서 아이도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아이는 어떤 순서로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경험했는가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경험만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아빠)가 보기에 정말 의미 있었던 특별한 경험들은 차치하고 제일 마지막에 했던 별 것 아니어 보이는 ‘그네타기’나 “성민이랑 놀았어.”같은 함께 했던 사람만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그네를 탔다는 것이나 성민이와 함께했던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경험을 회고(회상)했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 생각해보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와 회상(회고) 및 평가 작업을 할 때는 가장 먼저 몸을 낮추고 신체적인 눈높이를 맞춰야합니다. 때로 아이는 엄마(아빠)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먼저 대화를 시작할 겁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시작하는 말을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엄마 나 오늘 공원에서 다람쥐 봤지.”라고 했다면 “그래, 오늘 공원에서 다람쥐 봤지. 다람쥐가 뭘 하고 있었지?” 혹은 “그래, 오늘 공원에서 다람쥐 봤지. 다람쥐가 어떻게(왜) 거길 왔을까?” 등 입니다. 때로는 어른이 먼저 아이의 회상(회고) 작업을 시작할 수도 있는데 이때는 “아까 놀이터에서 정연이 정글짐 꼭대기까지 올라가더라.”처럼 엄마(아빠)가 관찰한 아이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아이가 놀이할 때의 모습을 아이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아이와의 회상(회고) 작업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다루었던 ‘계획하기’와 연결하여 진행한다면 더욱 풍부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요.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지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잘했어!” “최고야!” 같은 칭찬의 말은 삼가야합니다. 그보다는 “그래, 그랬구나!” 같은 추임새와 함께 아이의 말(행동)을 그대로 반복하고 따라하면서 지지(지원)합니다. 아이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붓펜으로 이름을 한번 쓰고, 두 번 쓰고, 세 번 썼어요.”라고 했다면 그 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며 “붓펜으로 이름을 한번 쓰고, 두 번 쓰고, 세 번 썼구나!” 같은 방법입니다.
엄마(아빠)는 ‘듣는’ 사람으로 아이의 이야기가 보다 깊고 풍부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자세가 필요한데, 아이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대화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또한 여러 개의 질문을 한꺼번에 퍼붓기 보다는 절제하며 하나씩 묻는 것이 좋으며, 질문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열린 형태를 띠어야 합니다. 엄마(아빠)는 전략적인 질문으로 아이를 보다 성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이가 블록으로 시소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양쪽이 똑같이 떠있게 만들었니?”나, 칭얼거리는 동생을 달래주었다면 “어떻게 지석이를 웃게 만들었니?”같은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내적 이미지를 만들고 분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놀이 중이라도 엄마(아빠)는 적절한 순간에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하면 어떨까?”처럼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들을 질문해 아이의 사고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이 때 어른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을 연결시켜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데 “카펫 위에서는 플라스틱 기둥이 자꾸 넘어졌는데 마룻바닥에 세우니까 단단히 서있네.” “다리를 잡고 안았을 때는 강아지가 낑낑거렸는데 몸통을 들어 안으니 가만히 있는구나.” 같은 말은 아이들로 하여금 회고(회상) 및 평가를 통해 보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 습관을 길러줍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면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되돌아보고 분석, 평가하여 보다 나은 방법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됩니다.
지난 번 ‘우리 아이들이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 1’에서 다루었던 내용이 아이들로 하여금 내 인생에 대한 의도와 목적, 계획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번 칼럼은 아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자신의 경험을 인식하고 인지하는 힘을 갖게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 입니다. 사고하는 힘, 질문하는 힘, 성찰하는 힘, 스스로 서는 힘, 그리하여 새롭게 만들어내는 힘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연마 끝에 체득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들어가면 저절로 얻어진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야말로 머리가 굳어진 후에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교육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Ann S. Epstein(2012), Approaches to learning, HighScope press.
-Ann S. Epstein & Mary Hohmann(2012), The HighScope preschool curriculum, HighScope press.
-Mark Tompkins(1990), A look at looking back: Helping children recall, Extension, Jan/Feb 1990 Vol 4, No 4, HighScope educational research foundation.
-Bodrova, E., & Leong, D.(2007), Tools of the mind: The Vygotskian approach to early childhood education(2nd ed.). NY: Prentice Hall.
:: [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연습1 ]칼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