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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추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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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JPG»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멀쩡한 이유정
유은실 지음
푸른숲 펴냄(2008)

38년 만에 가장 이른 한가위라고 한다. 여름이 채 지나기 전에 닥친 9월 초순의 한가위다.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해마다 한가위는 2학기 중간고사 기간과 딱 겹쳐 있어 중고등학생은 으레 집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랜만에 손주가 보고 싶지만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다. 손주를 보는 데도 시험 눈치를 봐야 한다. 조부모가 되어 손자를 보는 기쁨을 ‘뼈가 녹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리 피붙이라도 자주 봐야 서로 정이 깊어지는 법인데 다들 바쁜 세상이다.

현실이 이러니 우리 동화에서 조부모를 만나기 쉽지 않다. 예컨대 1997년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를 겪으며 가정 붕괴가 일어나자 동화 속에 아빠 없는 아이들이 많이 등장했던 것과 비슷하다. 모든 문학이 사람살이를 반영하듯 어린이문학도 삶을 비추는 까닭이다. 하지만 사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어린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고 하는데, 정말 노인과 아이는 서로 잘 통한다. 부모는 때로 돈을 벌고, 집을 사고, 승진을 하고, 집안일을 하느라 아이와 제대로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노인들은 아이의 진짜 속내를 알아본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문학 속에 믿음직한 우군으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등장하는 거다.

유은실의 동화를 읽으면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작품 속에 노인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노인들의 모습과 행동거지가 아주 생생하게 그려진다. 단편집 <멀쩡한 이유정>도 그런 책이다. 단편 ‘할아버지 숙제’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었다. 술 먹고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주정뱅이 할아버지, 노름방에서 살다가 폐병이 든 할아버지, 나이 들어 바람난 할아버지까지 ‘진짜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동화 속에 등장한다. 한데 큰일 났다. 선생님이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아이는 자랑할 것 없는 할아버지가 부끄럽고 할머니는 이놈의 영감 평생 내 숙제더니 이제는 아이 숙제가 되었다며 혀를 찬다.

‘새우가 없는 마을’에도 생활보호대상자로 손자와 단둘이 사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폐지를 팔아 모은 돈으로 손자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주는 ‘진짜 사나이’ 이용수 할아버지다. 손자를 데리고 자장면을 먹으러 갈 때는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할아버지는 왕새우를 사러 나섰다가 ‘대형 마트’에 가야 한다는 말에 그만 기가 죽는다. “거기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 자가용 있는 사람들만 가는 곳”인데다 돈을 넣고 카트를 끌어야 한다는데 자신이 없다. 뒤돌아 가는 할아버지 어깨가 짠하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할머니 말대로 우리 할아버지들은 철없어 보일 때가 많다. 그래도 유은실 동화 속의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이들이 그 누구보다 어린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어 연민이 든다. 작가는 비록 남 앞에 자랑할 건 없지만 “애들도 알 건 알아야 한다”며 그 속에서 나름대로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법을 배우자고 말한다. 이번 한가위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해보자. 터무니없는 자랑 말고 힘들었지만 착하게 살았던 솔직한 이야기 말이다. 초등 2~3학년.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한겨레 신문 2014년 9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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