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병원 여성노동자 17.4%
‘임신순번제’ 경험 털어놔
“힘들게 얻은 첫아이라, 그래도 다들 기뻐해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수간호사님이 던진 첫마디는 ‘꼭 지금 낳아야겠니?’였어요. 사실 제 차례는 아니었거든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이아무개(31) 간호사가 말한 ‘차례’란 정해진 임신 순서를 가리킨다. 가임기 여성이 아이를 가질 때 미리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야 한다는 조직 내부의 규칙을 흔히 ‘임신순번제’라고 한다. 이 간호사는 지난해 임신순번제를 지키지 않아 심한 직장 내 따돌림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 간호사는 10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3교대 방식으로 근무하는 응급실에서 예상치 않게 간호사 한명이 근무조에서 빠지면 다른 이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결혼과 함께 임신 계획을 미리 병원에 알리고 임신 순서를 배정받는다”며 “정해진 순서를 무시한 채 임신을 하거나 육아휴직을 신청하려면 그에 따른 인사상 불이익 등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의 주요 공공병원과 대학병원 등 보건의료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상당수가 직간접으로 임신순번제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임신과 출산의 자율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은 10일, 지난 3월부터 두달간 조합원 1만8263명을 상대로 노동조건 실태조사를 해보니 병원 등 보건의료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일부는 법으로 금지된 임신부의 야간근로를 떠맡는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임신을 한 적 있는 간호사 1902명 가운데 사업장에서 임신의 순번을 정하는 ‘임신순번제’를 경험한 여성이 전체의 17.4%(365명)로 조사됐다. 임신순번제를 겪었다고 응답한 여성 노동자는 공공병원(20.2%)과 사립대병원(20.7%)에 상대적으로 많았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런 임신순번제는 주로 부서장의 지시 아래 이뤄지며 이를 거부하거나 마음대로 임신하면 근무표 배정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보건의료 사업장에서 일하는 임신부 가운데 야간근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이는 21.9%에 이르렀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임신부의 야간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임신부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8시간으로, 노동 강도와 근무 환경 등 탓에 유·사산을 경험한 비율은 18.7%로 나타났다.
윤은정 보건의료노조 정책부장은 “보건의료 사업장에서 이처럼 모성보호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가 숱한데도 정부에서는 단 한번도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하지 않았다”며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는 말로만 저출산 고령화 대책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가 왜 출산을 꺼리게 되는지 현장 실태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 신문 2014년 10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