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제일 커 보이는 것... 이게 큰 아이의 운명이다.
네살 막내는 아직도 물고 빨아야 할 이쁜 애기지만, 둘째가 네살일때 막내를 낳고보니
네살 아이는 다 큰 아이로 여겨졌다. 그래서 '너 혼자 해'를 달고 살았다.
둘째가 이 정도니 여덟살 큰 아이는 당연히 이제 엄마가 안 도와줘도 되는 아이로 느껴졌다.
모든 관심이 늘 제일 어린 막내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갓 태어난 막내 때문에 입학후 첫 등교부터 동네 엄마들과 함께
해야 했던 큰 아이의 마음은 늘 허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주 떼를 쓰고 나를 힘들게 했다.
마음이 읽혀도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 때문에 큰 아이의 응석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큰 아이랑 관계가 힘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초등 2학년까지 일반학교를 다니고 3학년부터 대안학교로 옮긴 후에는
학교가 편해졌으니 아이도 훨씬 더 편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적어도 학교에 안 간다는 말로 싸우는 일은 없어졌지만 큰 아이는 늘 나를 찾았다.
눈만 마주치면 안아달라, 뽀뽀해 달라 조르곤 했다.
동생들만 이뻐한다고, 자기는 안 사랑한다고 삐지곤 했다.
그럴때마다 아니라고, 너도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큰 아이는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 왜 어린 동생들만 더 많이 안아주냐고 따지곤 했다.
늘 답답했다.
이제 저만큼 컸는데 엄마보다는 친구가 더 좋을 나이인데 아직도
안아달라 뽀뽀해달라고 조를까.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만 4년을 그렇게
물고 빨고 하며 키웠는데 이젠 동생들 차례인 것 뿐인데 왜 그걸 몰라줄까 생각했다.
그래서 큰 아이는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라는 느낌이 컸다.
몸은 점점 크는데 기어코 내 무릎에 올라타서 안아 달라고 조르는 큰 아이가
때로는 밉기도 했다. 막내와의 스킨쉽은 아무렇지 않고 좋은데
내 키만큼 큰 큰 아이가 입술을 내밀고 내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는 것은
편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으니 이젠 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을까..
그런 생각만 했다.
주변 엄마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동생들이 많아서 오히려 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고, 큰 아이도 더 자주 먼저 안아주고 부벼주고 해 달라고
큰 아이 마음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이 많았다.
내가 새 집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큰 아이한테도 할만큼 하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큰 아이에게 충분히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씩 있는 큰 아이 학교 반모임에서 담임선생님에게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다. 큰 아이는 '늘 사람을 그리워 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남자인 담임선생님에게 제일 많이 안기고 부벼대는 것도 필규란다. 그런데
늘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그 마음을 알아줘야 와서 안긴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던 여러 반 엄마들이 필규가 엄마를 늘 그리워 한다고
동생들에 비해 제가 덜 사랑받는 듯이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을 해 주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필규는 여전히 내 손길에 허기가 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습관처럼 매달리고 조르는 것처럼 여겼는데 큰 아이에게는 아직도
내 품이, 내 손길이, 저를 보듬어 주고 품어주는 내 사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열한살이라고 다 큰 것이 아니다. 첫 아이라고 엄마품이 덜 그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엄마 품을 파고드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엄마를 더 그립게 했는지도 모른다.
안아달라, 뽀뽀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큰 아이의 투정이 아니라
늘 진심으로 나를 원하는 외침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일로 큰 아이와 갈등을 겪었던 한 엄마가 조언을 해 주었다.
일주일에 하루를 큰 아이만을 위한 날로 정해 그 날은 엄마가 큰 아이방에가서
단 둘이 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큰 아이와 관계가 아주 좋아졌단다.
그렇게 할 수 도 있구나. 왜 그런 생각을 못 해 봤을까.
막내 젖을 뗀지도 몇 달 되었는데, 이제 막내는 아빠와도 잘 자는데
진작에 큰 아이와 단 둘이 잘 생각을 해 볼것을...
집으로 돌아와서 큰 아이와 얘기를 했다. 매주 토요일은 내가 큰 아이와 단 둘이
큰 아이 방에서 자기로 했더니 너무 좋아한다.
그날도 일찍 잠든 막내를 살그머니 남편이 있는 침대로 옮겨놓고 양쪽에
큰 아이와 둘째를 껴안고 잤다.
아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전적으로 아이 입장에서 채워져야 하는게 맞다.
나는 충분히 사랑해주고 있다고 해도 아이가 여전히 허기져 있다면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동안 큰 아이랑 제일 다툼이 많았는데 마음 속에 늘 엄마가 고픈 상태였으니
나와 관계가 편할리 없었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안아달라 뽀뽀해달라는 말도 중학교 들어가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큰 아이를 품어 볼 수 있는 날도 길지 않다는 뜻이구나.
늘 다 큰 아이처럼 밀어내고 야단치고 기대했던 것이
아직도 큰 아이를 내게 더 매달리고 허기지게 했었구나. 충분하게 듬뿍 채워주지도 않고
이제 다 먹었으니 상에서 일어나라고 등만 떠밀었구나...
이제 두 여동생이 엄마와 떨어져도 잘 자고 아빠와도 잘 지내니
정말 열심히 아들과 단 둘이 외출하고 잠 자고 숙덕거리고 킬킬거리는 시간들을
만들어 봐야겠다.
이 나이가 되어도 늘 엄마가 그리운데 11살 아이에게 어른처럼 굴라고 했었다니..
엄마는 늘 이렇게 실수하고 다시 깨우치며 또 배우는 존재란다. 아들아..